실리콘밸리에 있는 벤처캐피털에서 6개월간 인턴을 했을 때 영어도 서툴고 업계도 잘 몰라서 업무 이해도가 낮았고, 실제로 기여한 것도 별로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운이 좋게 다양한 창업가들의 IR 발표 자리에 동석할 수 있었습니다.
거의 모든 미팅에서 창업가들은 하나같이 "Change the World"를 외치며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반드시 해낼 수 있다고 믿고 실행해 나갔고, 그런 창업가들에게 매료된 것이 제가 직접 창업을 한 계기가 됐습니다. 너무나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나중에 미국에 다시 갈 일이 생겨 당시 상사, 지인들과 저녁을 먹기로 했는데, 아쉽게도 저는 사정이 생겨 그 자리에 못 갔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상사가 다른 건 몰라도 제가 넘지 못할 선이 없는 것 같다고 했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스스로 선을 긋지 않고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다고 보고 덤비는 점을 높이 산다는 뉘앙스였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들은 지 벌써 15년 가까이 됐지만, 지금도 일을 하다 뭔가 막힐 때마다 그 말을 떠올립니다.
선을 넘는다는 것
저는 개발자 출신이 아니지만 AI 가 없던 시절부터 어떤 문제를 만나면 분명히 누군가 이 문제를 이미 해결해서 방법을 만들어 놨을 것이라 믿고 찾아다녔습니다. 그 당시에는 실제로 다른 사람들이 크롬 확장 프로그램이나 구글 시트 앱스 스크립트로 만들어 둔 해결책이 많아서, 꽤 많은 문제를 그렇게 풀 수 있었습니다.
작년 10월 AI를 기반으로 뭐든 직접 만들 수 있다는 확신이 든 이후로는, 기존에 쓰던 유료 소프트웨어들조차 직접 만들어 쓸 수 있겠다고 생각한 것들은 직접 만들어 썼습니다. 많은 실패가 있었지만, 그래도 제가 만든 서비스/시스템을 활용해서 업무를 효과적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아래는 제가 직접 만들어서 쓰거나, 배포한 서비스 예시들입니다.
제가 쓰려고 만든 것들
1. 회의 자동 녹음 (LCC Audio)
회의 때마다 녹음 버튼을 눌러야 하는데 안 눌러서 실제로 녹음이 안 된 경험을 자주 해보셨을 것입니다. 사소하지만, 의식적으로 녹음 버튼을 눌러야만 회의 내용이 저장되는 경우 실수로 녹음을 못 하는 경우가 워낙 많아서 업무용 노트북은 아예 상시 녹음을 하는 앱을 만들었습니다. 제가 원하는 시간대 녹음을 바탕으로 회의록을 만들라고 하면 회의록을 작성해 줍니다.
상시 녹음이라 사생활 보호 이슈가 좀 있을 수도 있지만, 업무용 노트북이기도 하고 모든 녹음 내용을 자동 분석해서 회의록을 만드는 게 아니라 제가 요청한 것만 회의록으로 만들어서 매우 효과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2. 캡처 바구니
기존에는 캡처할 때마다 이미지가 스크린샷 폴더에 쌓이면, 그걸 선택하고 드래그해서 클로드 코드(AI 코딩 에이전트)한테 보냈습니다. 전체 화면에서 스크린샷을 하면 파인더에서 스크린샷 폴더를 열고 거기서 클로드 코드도 보이게 창을 조절하고 드래그하는 게 역시나 사소하지만 매우 귀찮았습니다. 그래서 여러 장 캡처하고 붙여넣기(command+V) 버튼만 누르면 클로드 코드에 한 번에 다 전송되게 만들었습니다.
한 번 붙여 넣은 건 다음 붙여넣기 때 빠지고 그 이후 것들만 붙여넣기가 되는데, 이전 스크린샷이 필요하면 예전처럼 폴더에서 확인하고 재사용이 가능합니다.
둘 다 정말 단순한 서비스이지만 이 두 서비스 덕분에 업무 효율이 매우 올라갔습니다. 이 외에도 이런 기능들을 만들어서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 다운로드 폴더 자동 정리: 다운로드 폴더를 정기적으로 자동 정리해 구글 드라이브로 옮깁니다.
- 음성으로 업무 요청: 받아쓰기 기능을 통해 채팅 대신 음성으로 업무를 요청합니다.
예전에는 남이 만든 서비스를 제가 원하는 대로 고치는 게 불가능해서 조금 불편해도 사용해야 했지만, 지금은 불편한 게 있을 때마다 너무 쉽게 고쳐 쓸 수 있어서 점점 업무가 편해지고 있습니다.
3. 할 일 관리
할 일 앱도 여러 개 써 봤지만, 지금은 할 일을 넘어 제 생활 전체를 관리하는 라이프 커맨드 센터라는 서비스를 직접 만들어 씁니다. 개인 일/업무 일 할 것 없이 모든 일을 여기서 챙기고, 여기 쌓인 정보를 업무에 쓰기도 하고 반대로 업무에서 쌓인 정보를 여기로 가져오기도 합니다.
4. 불편해서 만들었더니 서비스가 된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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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갈날: 가족여행 때마다 어느 지역 어느 숙소에 언제 가야 쌀지 검색하고, 취소 가능한 걸 예약해 뒀다가 더 싼 게 나오면 바꾸던 일을 자동화하다 만들었습니다.
크루즈 여행의 경우 크루즈 값이 내려가도 직접 확인해서 판매 대행사에 요청(리프라이싱)해야만 깎아 주다 보니 주기적으로 검색해서 요청했습니다. 이제는 리프라이싱이 가능한 가격이 될 때마다 알림을 받고, 대행사에 보낼 내용도 다 정리돼서 저는 확인하고 한 번만 클릭해서 보내기만 하면 됩니다.
이 기능으로 첫 예약 대비 300만 원 이상 저렴한 가격으로 예약을 변경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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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저가날: 음식물 처리기를 사려는데 이틀 만에 이전에 봤던 가격보다 5만 원이 올라 구매를 망설이다가, 가격 추적 서비스를 만들어서 5만 원이 다시 내렸을 때 산 경험으로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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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그림찾기: 아이가 우당탕탕 야옹이 숨은그림찾기 3권을 두 달 동안 정말 많이 했습니다(한 권씩 나눠서 사 줬습니다). 그런데 이 시리즈가 3권이 끝이라, 비슷한 숨은그림찾기를 직접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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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스북: 추리 게임을 좋아해서 방탈출, 온/오프라인 보드게임, 크라임씬 같은 콘텐츠를 거의 다 해 보고 더 할 게 없어서, 누구나 크라임씬류 추리 게임을 즐길 수 있게 직접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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챌린지킴: 정보를 모으고 생각을 정리해 글을 쓰는 일을 한곳에서 하려고 만든 제 사이트입니다(이 뉴스레터도 여기서 나갑니다).
서비스는 아니지만 집 인터넷 환경을 손보거나 고장 난 물건을 고칠 때도 AI 에게 영상/사진을 보여 주고 직접 수리했습니다. AI 를 비서로 쓰는 단계를 넘어, 이제는 AI 와 함께 일하는 게 너무 익숙해졌습니다.
AI 를 잘 쓰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제 주변을 보면 AI 를 얼마나 잘 쓰는지를 가르는 가장 큰 차이는 일종의 자신감입니다.
선을 넘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은 "해보면 되지, 할 수 있을 거야"라는 마음으로 AI 를 공부하고 직접 써 봅니다. 서비스를 만들고 업무에 붙여 보면서 여러 벽을 깨고, 그 경험이 다시 자신감이 됩니다. 마케터였던 분이 개발/디자인까지 하고, 흔히 말하는 "우리는 모두 빌더다"처럼 배포까지 직접 해내는 1인 창업자 같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반대로 "이건 내 일이 아니야", "이런 건 내가 못 해", "AI 는 채팅으로 이 정도까지만 되는 거 아닌가?" 하고 선을 그어 두는 분들도 생각보다 많습니다. 이런 분들은 AI 로 문서를 검토하거나 정리하는 정도만 달라졌을 뿐, 일하는 방식이 예전과 크게 달라졌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결국 일하면서 느끼는 미묘한 불편함을 하나씩 고쳐 효율을 올리는 데에는 이 관점이 상당히 큰 영향을 줍니다.
비개발자들까지 AI 를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지 이제 1년 정도밖에 안 됐는데, 제 주변을 보면 벌써 생산성이 10배 이상 차이 납니다. 에이전트를 24시간 돌리느냐 마느냐를 넘어서 일하는 환경 자체가 다릅니다.
같은 문제를 받아도 어떤 사람은 그동안 세팅해 둔 환경과 쌓아 온 경험으로 마케팅/기획/디자인/개발/문구까지 전부 설계해서 완성하고, 어떤 사람은 아직 자기 포지션의 일만 하고 나머지는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이 차이는 시간이 갈수록 더 벌어질 겁니다.
T자형에서 블록형 인재로
이미 많은 회사들이 전통적인 직군(기획, 디자인, 개발, PM 등)이 아니라 빌더라는 이름으로 혼자서 문제를 끝까지 해결할 수 있는 사람들을 채용하려고 합니다.
링크드인은 신입 PM 을 키우던 APM(Associate Product Manager) 과정을 없애고, 기획/디자인/코딩을 함께 가르치는 APB(Associate Product Builder) 과정으로 바꿨습니다. 과정을 잘 마친 사람은 "풀스택 빌더"로 이어서 일하게 됩니다(레니의 팟캐스트, 링크드인 CPO 토머 코헨 편 한국어 요약본).
예전에는 제너럴리스트가 오히려 취업이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한 분야를 깊게 잘하고 나머지는 두루 아는 T자형 인재를 선호했는데, 요즘은 여러 분야를 다 깊게 해내는 블록형 제너럴리스트를 원하는 시대가 된 것 같습니다.
올해 3~4월 Cognizant 와 Pearson 이 미국/영국/인도의 직원 1,000명 이상 회사에서 디렉터급 이상 인사 담당자 750명에게 물었습니다. 그 결과 69%가 경력 초기 인재에게는 전문 기술이나 한 분야 전공보다 여러 분야에 걸친 배경이 더 중요하다고 답했습니다(Cognizant 보도자료).
Claude Code 를 만든 보리스 체르니도 Y Combinator 인터뷰(19분 3초부터)에서 팀에서 가장 일을 잘하는 엔지니어들이 양 극단으로 나뉜다고 했습니다.
한쪽은 극단적인 스페셜리스트이고, 나머지 팀 대부분은 제품과 인프라, 제품과 디자인, 제품과 사용자 리서치, 제품과 비즈니스를 넘나드는 하이퍼 제너럴리스트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상한 일(weird stuff)을 하는 사람"을 보는 게 좋다고 했습니다.
Anthropic 에서 Claude 디자인을 이끄는 제니 웬도 레니의 팟캐스트(47분 5초부터)에서 지금 눈여겨보는 사람 중 첫째로 강력한 제너럴리스트를 꼽았습니다. 여러 가지를 적당히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몇 가지 핵심 역량을 상위 20% 수준으로 잘해서 T자형보다 블록에 가까운 사람이라고 합니다.
디자이너 역할이 점점 PM/엔지니어 쪽으로 넓어지고 있어서 이런 사람이 역할을 넓히기 쉽다는 이유였고, 본인도 드물어서 뽑기 어렵다고 했습니다(한국어 정리).
나를 막는 선은 없다
취업이든 창업이든 이런 사람들이 찾는 사람이 되기 위해 오늘부터 가질 마음가짐은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나도 선을 넘을 수 있다. 나를 막는 선은 없다.
그다음은 꾸준히 시도하고, 시행착오를 겪고, 고쳐 나가는 일만 남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디에 선을 그어 두고 계신가요? 직접 만들어 보고 싶었는데 망설이고 있는 것이 있다면 댓글이나 메일 회신으로 알려주세요. 글이 마음에 드셨다면 주변에 공유해 주시거나 구독을 권해 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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