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심 요약

  • 역사학자 에이다 팔머에 따르면 《군주론》의 배경에는 정권 교체가 잦아진 이탈리아 도시국가와 교황권의 군사적 팽창이 있었다.
  • 마키아벨리는 권력을 얻는 수단이 이후의 안정성을 좌우한다고 봤다. 두려움과 배신도 누구에게, 어떤 기반 위에서 쓰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랐다.
  • 팔머는 체사레 보르자의 몰락을 그의 모든 선택이 잘못됐다는 증거로 읽지 않는다. 마키아벨리가 통제할 수 없는 운의 몫을 강조한 사례로 해석한다.
  • 마키아벨리가 지키려 한 피렌체의 자유는 통치자가 시민을 자의적으로 처형할 수 없다는 절차적 차이와 연결돼 있었다.
  • 팔머가 그리는 마키아벨리는 사익만 좇는 ‘마키아벨리주의자’와 거리가 멀다. 그는 자신을 고문하고 추방한 정권에도 피렌체를 위해 봉사하려 했다.

정권이 무너진 뒤의 이탈리아

마키아벨리가 1513년 《군주론》을 메디치 가문의 로렌초에게 바칠 무렵, 팔머의 설명에 따르면 이탈리아의 많은 도시국가는 이미 기존 정부가 뒤집힌 상태였다. 오래 지속된 정부가 지닌 관습과 신뢰가 끊기면 새 정권도 쉽게 다시 무너질 수 있다. 마키아벨리는 이런 연쇄적인 교체를 눈앞에서 봤다.

교황권도 불안정의 한 축이었다. 연이은 교황들이 군사력을 키우고 도시의 통치자를 갈아치우는 선례를 만들었다. 교황은 세습되지 않으므로 다음 교황이 누구일지, 전임자의 정책을 얼마나 뒤집을지도 예측하기 어려웠다. 팔머는 마키아벨리가 메디치 가문에 기대한 일을 이탈리아 전체의 통일보다는, 교황권이 함부로 흔들 수 없을 만큼 강한 세력을 형성해 지역을 안정시키는 것으로 설명한다.

체사레 보르자에게서 본 권력과 운

외교관이었던 마키아벨리는 체사레 보르자를 가까이에서 지켜봤다. 팔머에 따르면 보르자가 이탈리아 중부를 정복할 때 피렌체는 그를 막을 힘이 없었다. 마키아벨리가 피렌체에 제안한 협력은 보르자의 힘을 빌려 성장하려는 전략이 아니라,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이는 정복 앞에서 시간을 버는 생존책이었다.

보르자는 반역을 꾀했다가 물러선 부하들을 용서하는 듯한 태도를 보인 뒤 연회에서 살해했다. 팔머는 이 사건이 다른 부하들의 복종을 강화했다고 설명하면서도, 그것을 모든 통치자에게 통하는 배신의 공식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보르자는 이미 두려운 정복자로 인식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종교적 권위와 예언에 기대던 사보나롤라는 앞선 말과 어긋나는 주장을 거듭하면서 자신의 권력 기반을 해쳤다는 것이 팔머의 비교다.

보르자의 몰락 역시 단순한 성공과 실패의 교훈으로 환원하기 어렵다. 팔머가 설명하는 마키아벨리의 관점에서, 보르자는 아버지인 교황의 죽음에 대비했지만 자신도 같은 시기에 병들 가능성까지 막지는 못했다. 뒤이은 교황의 이른 죽음과 정적의 대응도 겹쳤다. 마키아벨리에게 결과를 판단하는 일은 승패만 보는 것이 아니라, 선택 당시 기대할 수 있었던 결과와 통제 밖의 운을 구분하는 일이었다.

두려움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통치

‘사랑받기보다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편이 낫다’는 말도 팔머의 해석에서는 조건을 가진다. 호의와 약속에 권력이 기대고 있다면 지지가 흔들릴 때 충성도 사라질 수 있다. 처벌에 대한 예상은 더 오래 버틸 수 있지만, 통치 방식이 증오를 낳는 문제까지 없애주지는 않는다. 마키아벨리는 용병이나 더 강한 외부 세력의 도움으로 얻은 권력 또한 그 세력에 의존하게 돼 불안정하다고 봤다.

팔머는 《로마사 논고》에서 다른 안정의 길도 찾는다. 마키아벨리는 시에나를 사례로 들며 경쟁 세력이 한 도시 안에서 공존하고 선거를 통해 힘을 조정할 가능성을 논했다. 상대 정파를 없애야 평화가 온다는 당시의 통념과 다른 발상이었다. 팔머의 설명에서 마키아벨리의 관심은 잔혹한 수단 자체보다, 어떤 제도와 권력 기반이 정권을 오래 버티게 하는지에 놓여 있다.

후원 관계와 공정한 재판

당시의 후원 관계는 유력 가문이 사람을 보호하고 일자리와 영향력을 제공하는 사회적 연결망이었다. 팔머에 따르면 재판에서도 후원자의 개입은 감형을 얻는 통상적인 경로였다. 같은 범죄라도 어느 가문과 연결됐는지에 따라 결과가 크게 달라질 수 있었다.

팔머는 보르자가 정복한 도시에서 기존 지배 가문을 제거한 뒤 외부인으로서 재판을 처리한 사례를 든다. 기존 파벌에 얽매이지 않은 판결은 잔혹한 정복자에 대한 예상과 달리 일부 주민의 지지를 얻었다. 그에게 복종할 이유가 공포만은 아니었던 셈이다.

그러나 팔머는 공정하게 행동할 수 있는 군주와 자유로운 정부를 구별한다. 마키아벨리에게 시민을 재판 없이 마음대로 죽일 수 있는 권력자가 존재한다면, 그 시민은 자유롭지 않았다. 피렌체의 제도가 편파적이거나 자신을 고문하고 추방했더라도, 공개적인 절차가 남아 있는 상태와 한 사람의 명령으로 생사가 결정되는 상태는 달랐다.

추방 중에 쓴 군주를 위한 문서

마키아벨리는 메디치 정권 아래 고문당하고 피렌체 밖 시골로 추방됐다. 팔머는 그에게 다른 궁정에서 일할 길이 있었을 것이라고 보지만, 그가 피렌체를 위해 다시 일하기를 바라며 머물렀다고 설명한다. 이 해석에서 《군주론》은 자신을 복귀시켜 달라는 요청이자 새 통치자에게 건네는 권력 유지의 조언이었다.

팔머는 마키아벨리 생전 《군주론》의 독자가 피렌체 통치자와 가까운 지인들로 제한됐다고 말한다. 당시에는 군주 한 사람을 위해 소수의 필사본만 만드는 정치 지침서도 있었다. 그의 다른 저술이 널리 읽히기를 염두에 둔 작업이었다면, 《군주론》은 우선 특정 정부에 제공하는 문서였다는 설명이다.

책이 널리 읽히며 생긴 또 하나의 마키아벨리

마키아벨리 사후 가족은 그의 명성과 가문의 이름을 알리기 위해 《군주론》의 출판을 추진했다. 이후 책은 금서 목록에 오르기도 했다. 팔머에 따르면 이 저술이 여러 나라에서 널리 읽히는 고전이 된 것은 훨씬 뒤인 19세기였다. 종교 제도와 별개로 정치의 결과를 검토하려는 독자들과 마키아벨리를 근대적 사상가로 내세우려는 이탈리아의 관심이 그 수용에 영향을 줬다.

다만 팔머는 마키아벨리가 종교를 무시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로마사 논고》에서 그는 종교가 시민의 행동과 국가에 대한 헌신에 미치는 영향을 따졌다. 이는 특정 종교의 진리를 국가 운영의 출발점으로 삼는 일과는 다른 접근이었다.

팔머가 마지막으로 구별하는 것은 저술 속 인물과 후대가 만든 인물상이다. 음모와 사익을 좇는 정치가를 뜻하는 ‘마키아벨리주의자’라는 표상은 독자적인 생명을 얻었다. 그 표상만으로는 정권의 안정, 시민의 자유, 피렌체에 대한 충성을 함께 고민했던 마키아벨리의 글과 행적을 설명하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