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심 요약
- 코르테스와 피사로는 각각 아즈텍과 잉카의 최고 지도자를 붙잡아 기존 권력 구조를 장악하려 했다.
- 말과 강철 무기는 전투에서 우위를 줬지만, 정복을 끝내는 데는 제국에 반발한 현지 동맹군이 필수적이었다.
- 아즈텍과 잉카도 기병을 막을 방법을 익혔다. 다만 전쟁과 질병 속에서 새 전술을 널리 적용할 시간은 짧았다.
- 역사학자 시 셰퍼드는 당시의 승리가 여러 선택에 좌우됐다고 보면서도, 장기적으로는 유라시아에서 건너온 질병이 두 제국을 약화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코르테스가 얻은 것은 병력보다 동맹이었다
에르난 코르테스가 내륙으로 들어갔을 때 그의 병력은 수백 명이었다. 그는 아즈텍의 지배를 불만스럽게 여기던 토토나크족과 관계를 맺었다. 이어 수천 명 규모로 맞서던 틀락스칼라 세력과 교전한 끝에 동맹을 이루고, 이들의 안내와 지원을 받아 수도 테노치티틀란으로 향했다. 틀락스칼라는 아즈텍에 포위되고 해안과 소금 공급원에서 차단된 상태였다. 셰퍼드의 설명에서 이 동맹은 스페인에 일방적으로 협력한 결과가 아니라, 틀락스칼라가 자신의 처지를 바꾸기 위해 택한 전략이었다.
코르테스는 수도에서 황제 목테수마 2세를 만났다. 해안에 남긴 스페인인 일부가 아즈텍 측 공격으로 죽자, 그는 이를 구실로 목테수마를 데려가 그를 통해 제국을 통제하려 했다. 그러나 쿠바 총독이 보낸 체포 부대를 상대하러 코르테스가 수도를 떠난 사이, 부하 알바라도가 축제에 모인 아즈텍 귀족과 전사들을 학살했다. 돌아온 코르테스는 포위됐고, 야간 탈출 과정에서 많은 병력을 잃었다. 목테수마의 죽음에 대해서도 대담은 투석으로 치명상을 입은 뒤 죽었는지, 스페인 측이 그를 죽였는지 확정하지 않는다.
코르테스는 틀락스칼라 영토로 후퇴했다. 셰퍼드는 이때 틀락스칼라가 동맹을 끊었다면 스페인 병력이 살아남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본다. 이후 토토나크족을 비롯한 여러 현지 세력이 다시 합류했다. 셰퍼드에 따르면 테노치티틀란을 향한 최종 진군 병력에서 스페인인은 수적으로 약 0.5%였다. 코르테스는 배의 부품을 산 너머 호수로 운반해 조립하며 수상 통제력도 확보했다. 1521년 테노치티틀란이 함락됐다.
피사로는 내전 직후의 황제를 생포했다
약 10년 뒤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잉카 영토에 들어섰을 때, 아타우알파는 형제 우아스카르와의 내전에서 막 승리한 상태였다. 피사로의 병력은 약 168명이었다. 1532년 카하마르카에서 아타우알파가 스페인 측을 만나러 좁은 공간에 들어오자 피사로는 매복 공격을 시작했고, 총포의 폭음과 기병 돌격 속에 그를 생포했다. 대담에서 스페인 측의 유일한 부상자는 아타우알파를 붙잡으려다 동료의 칼에 손을 베인 피사로로 설명된다. 아타우알파 측 사망자 수에 관해서는 대담 안에서도 추정치가 엇갈리므로 단정하기 어렵다.
아타우알파는 금과 은을 제공하면 풀어주겠다는 약속을 받았지만, 피사로는 이를 받은 뒤 그를 처형했다. 이후 스페인 측이 쿠스코를 장악하자, 꼭두각시 통치자로 세워졌던 망코 잉카가 반란을 일으켰다. 잉카군은 산악 통로 양쪽을 막고 높은 곳에서 바위를 굴려 해안에서 오는 스페인 지원군을 여러 차례 격파했다. 반면 해안 도시 리마를 공격할 때는 열린 지형에서 스페인 기병의 우위에 부딪혔다. 쿠스코의 스페인 병력은 기병이 움직일 수 있는 광장과 방어에 유리한 건물에 의지했고, 잉카의 지배를 받던 현지 집단도 이들에게 가세했다.
무기의 우위는 상황에 따라 달라졌다
셰퍼드에 따르면 당시 총은 재장전에 오래 걸려 지속적인 전투력보다 처음 듣는 폭음의 충격이 컸다. 강철 칼과 투구, 특히 말은 더 큰 차이를 만들었다. 기병을 막으려면 긴 창뿐 아니라 대형을 유지할 훈련도 필요했다. 스페인 병력이 위험에 빠지면 말을 타고 빠르게 후퇴할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현지 군대가 대응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아즈텍은 섬과 둑길로 이뤄진 도시에서 말의 기동력을 제한하고, 지붕 위에서 공격하거나 둑을 터뜨려 지역을 침수시켰다. 잉카도 강을 범람시켜 기병을 묶었다. 포획한 칼을 긴 장대에 달거나 올가미 형태의 사냥 도구로 말의 다리를 노렸고, 망코 잉카는 직접 승마를 익혔다. 스페인 병사들 역시 더 가볍고 현지 무기에 충분한 방어력을 주는 면 갑옷으로 바꿔 입기도 했다. 대담의 설명대로라면 현지 세력에는 대응할 능력이 전혀 없었던 것이 아니라, 새 무기와 전술을 익혀 전쟁의 흐름을 바꿀 시간이 부족했다.
제국의 구조와 질병이 만든 취약성
두 제국은 넓은 영토와 인구를 거느렸지만 하나로 결속된 집단은 아니었다. 코르테스는 아즈텍의 지배를 거부하던 세력과 동맹을 맺었고, 쿠스코에서는 잉카에 예속됐던 집단이 스페인 편에 섰다. 최고 통치자에게 권한이 집중된 구조도 그가 생포됐을 때 흔들렸다. 셰퍼드는 자율적인 도시국가들로 이뤄진 마야 지역에서는 같은 방식으로 한 번에 정복할 대상이 없어, 스페인의 정복이 훨씬 오래 걸렸다고 설명한다.
현지 세력이 스페인 내부의 갈등을 이용할 기회는 제한적이었다. 코르테스와 피사로의 진영에는 스페인인끼리의 경쟁이 있었지만, 아즈텍과 잉카가 처음 마주한 외부 세력은 스페인뿐이었다. 반면 아즈텍과 틀락스칼라의 적대 관계는 오래됐다. 셰퍼드는 스페인이 단기 전투에서 패했을 가능성은 인정한다. 그러나 천연두를 비롯해 유라시아에서 건너온 질병에 대한 면역이 없었던 점은 장기적으로 두 사회의 인구와 통치 능력을 약화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이는 실제 전투에서 특정 선택이 달랐을 때의 결과까지 확정하는 주장은 아니다.
정복 뒤 은이 연결한 교역
대담은 정복의 동기로 금과 은에 대한 욕망을 강조한다. 이후 스페인은 남아메리카의 은을 채굴해 유럽으로 보냈고, 태평양 항로를 통해 마닐라에서 중국 등의 상인들과 상품을 거래했다. 셰퍼드는 이를 교역망이 대서양과 유라시아를 넘어 연결되는 과정으로 설명한다. 동시에 그는 은의 유입이 스페인에서 물가를 올리고 실질임금을 떨어뜨렸으며, 자본시장과 독립적인 은행 체계의 발전을 늦췄다고 평가한다.
두 정복에서 스페인 병사의 수는 작았지만, 그들이 차지한 자리는 작지 않았다. 말과 강철은 전투에, 현지 동맹은 병력과 보급에, 지도자 생포는 권력 장악에 각각 작용했다. 대담이 보여주는 것은 어느 한 무기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승리와, 그 과정에서 각 현지 세력이 서로 다른 이해관계에 따라 내린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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