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심 요약
- 캐머런 힐리는 견과류를 유통·가공하던 경험을 바탕으로 1982년 오리건주 세일럼에서 케틀칩스 생산을 시작했다.
- 초기 생산 확대 과정에서 튀김 기름 관리에 실패해 세이프웨이 납품 물량이 반품됐다. 당시 견과류 사업의 작은 이익이 감자칩 사업을 버티게 했다.
- 힐리는 미국 동부로 넓히기 전에 영국 시장에 진출했다. 런던 기차역 매장 세 곳의 판매 결과를 확인했지만, 출시 직후 재주문이 끊겨 투자가 실패할 가능성도 있었다.
- 이후 입소문과 슈퍼마켓 주문으로 영국 사업이 성장했다. 힐리는 영국에서 배운 영업 방식이 훗날 미국 동부 진출에도 중요했다고 평가했다.
견과류 공장에서 시작한 감자칩
힐리는 1970년대 중반 자연식품 유통업을 시작했다. 냉장 트럭으로 우유와 식품을 운반했고, 이후 견과류를 직접 볶아 판매했다. 1978년 공동체가 운영하던 사업에서 물러난 뒤에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치즈와 견과류 유통을 이어갔다. 현지 은행에서 받은 운전자금 대출 1만 달러로 볶는 설비를 마련했고, 사업은 견과류 혼합 제품과 자체 브랜드의 땅콩버터·아몬드버터로 확장됐다.
감자칩 구상은 하와이 여행에서 처음 생긴 것이 아니었다. 힐리는 이미 마우이 감자칩 회사에 관한 기사를 읽고 제품을 검토하고 있었다. 여행 중 그 회사를 찾아가 제조 방식은 보지 못했지만, 원료 감자가 하와이가 아닌 오리건주 클래머스폴스에서 온다는 말을 들었다. 오리건에 사업 기반을 둔 자신도 비슷한 제품을 만들 수 있겠다고 판단한 계기였다.
힐리는 자연식품이 전문점 밖의 슈퍼마켓으로도 퍼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감자칩을 그 시장에 진입할 제품으로 봤다. 처음 생각한 이름은 ‘팟칩스’였지만 주변의 반응이 좋지 않아 포장 디자인의 ‘팟’을 ‘케틀’로 바꿨다.
밤마다 40상자씩 만들며 익힌 제조법
견과류 공장은 낮에 가동됐기 때문에 초기 감자칩 생산은 밤에 이뤄졌다. 작업자들은 감자를 절단기에 손으로 넣고 두 개의 튀김 설비를 사용했다. 힐리에 따르면 첫 생산량은 한밤에 40상자였고, 상자마다 봉지 12개가 들어갔다. 첫 제품이 나온 때는 1982년 7월 말이었다.
견과류를 볶던 경험만으로 감자를 다룰 수는 없었다. 힐리는 감자 반입분마다 튀겨지는 방식이 달라 시행착오를 거쳤다고 설명했다. 감자를 기름에 넣으면 온도가 떨어졌다가 다시 오르는데, 그는 나중에 이 온도 변화가 두꺼운 식감과 바삭함을 만드는 데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초기에는 별도 마케팅 없이 매장 진열에 의존했고, 생산 여력이 생긴 뒤 시식 행사도 시작했다.
세이프웨이 반품이 드러낸 생산 확대의 위험
힐리는 생산을 늘리기 위해 새 공장과 설비에 투자했다. 1982년 말 무렵 공장을 옮긴 뒤 세이프웨이 북부 캘리포니아 사업부가 전 매장 입점을 원했다. 이를 맞추려고 야간 근무조를 추가했지만, 납품된 감자칩의 기름이 산패한 것으로 확인돼 한 트럭 분량이 거절됐다.
힐리는 당시 튀김 기름이 어떻게 변질되는지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고, 근무조를 늘린 일이 관리 균형을 깨뜨렸다고 설명했다. 제품을 회수하고 공장을 멈춰야 했으며 수요도 한동안 사라졌다. 새 공장을 위해 대출까지 받은 상황이었다. 힐리는 견과류 사업에서 나는 작은 이익이 없었다면 케틀칩스가 살아남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이후 생산 문제를 바로잡고 사업을 이어갔다.
미국 동부를 건너뛴 영국 진출
1987년 힐리는 19세 아들과 유럽을 여행하다 런던에서 팀 마이어를 만났다. 두 사람은 영국 매장의 감자칩을 사서 맛을 비교했다. 힐리는 현지에 다양한 감자칩이 있었지만 자신들의 제품에도 기회가 있을 수 있다고 봤다. 동시에 유럽에 다시 가고 싶었던 개인적 동기도 있었다며, 영국 진출 판단에 순진한 면이 있었다고 인정했다.
본격적인 조사는 제한적이었다. 마이어는 런던 기차역 안 편의점 세 곳과 협의해 제품을 무료로 진열했다. 매장들은 판매 수익을 가져가는 대신 경험을 들려주기로 했다. 제품은 첫 주말에 세 곳 모두에서 팔렸고 매장 관리자들의 반응도 좋았다. 힐리와 마이어는 이를 수요의 신호로 받아들였지만, 확인한 표본은 세 매장에 그쳤다.
영국 공장을 세우고 소규모 유통업자를 통해 판매를 시작한 뒤에는 재주문이 한동안 들어오지 않았다. 마케팅 없이 매장에서 소비자가 제품을 발견하기를 기다리는 방식이었다. 공장 설립에 대출을 쓴 힐리는 입소문이 퍼지는 데 시간이 필요한 것인지, 소비자가 높은 가격이나 제품 자체를 원하지 않는 것인지 알 수 없어 불안했다고 말했다.
그러다 1989년 6월 초 주문이 갑자기 늘었고, 힐리의 설명에 따르면 같은 주에 슈퍼마켓 체인 다섯 곳이 연락했다. 영국 판매는 미국 판매를 넘어섰다. 마이어는 힐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높은 가격을 주장했고, 두 사람은 늘어나는 수요에 맞춰 공장과 설비를 확장했다. 힐리는 성장 자금의 상당 부분을 사업에서 벌어들인 돈으로 충당했다고 설명했다.
힐리는 영국에서 성공했다는 사실 자체보다 그곳에서 영업팀이 쌓은 경험이 이후 미국 동부 진출에 중요했다고 평가했다. 영국에서 먼저 만든 소금·후추 맛도 나중에 미국용으로 다시 개발했다.
다른 사업과 회사 매각
영국 사업이 성장하던 1993년 무렵, 힐리는 하와이에서 아들과 함께 양조장을 시작하기로 했다. 코나 브루잉은 1995년 첫 맥주를 생산했지만 하와이의 높은 제조비 때문에 한동안 월 약 2만 달러의 손실을 냈다. 병맥주 생산 일부를 미국 본토의 위탁 생산업체로 옮기는 등의 결정을 거쳐, 힐리에 따르면 1999년 1월 흑자로 돌아섰다.
케틀 사업은 2000년대 초 연매출 약 1억 달러에 이르렀다. 힐리와 마이어는 두 사람이 주요 결정을 내리던 방식에서 벗어나 외부 인사가 참여하는 이사회를 구성하려 했다. 사모펀드 캐터턴 파트너스에 회사 지분 약 3분의 1을 팔고 경영진과 전략 계획을 보강했다. 이후 2006년 영국 투자회사 라이언 캐피털이 케틀 푸즈를 인수했다. 진행자 가이 라즈는 거래액이 3억 달러를 넘는 것으로 보도됐다고 전했다.
케틀칩스의 출발점은 이미 갖고 있던 견과류 설비와 유통 경험이었다. 영국에서의 성장은 단기간에 이뤄졌지만, 그 전에 제조 실패를 견디고 적은 수의 매장에서 수요를 시험했으며 재주문이 없는 기간도 버텨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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