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심 요약

  • 코카콜라는 1886년 약국에서 판매하는 시럽 음료로 출발했다. 이후 약효보다 맛과 상쾌함을 강조하며 고객층을 넓혔다.
  • 본사가 시럽과 브랜드를 맡고 독립 사업자가 병입과 지역 유통을 맡는 구조가 미국 전역과 해외로 빠르게 확장하는 데 기여했다.
  • 무료 시음권, 매장 간판, 독특한 병 모양, 생활 장면을 담은 광고는 제품을 알아보고 반복 구매하게 만드는 수단이었다.
  • 펩시의 저가 대용량 병과 블라인드 시음 광고는 코카콜라의 기존 강점을 흔들었다. 원래 제품을 대체한 뉴코크는 소비자의 거센 반발 끝에 79일 만에 기존 제품의 복귀로 이어졌다.
  • 회사는 여러 음료로 사업을 넓혔지만, 방송에서 제시한 수치상 매출의 대부분은 여전히 탄산음료에서 나온다.

약국의 시럽에서 일상 음료로

코카콜라의 출발점은 미국 남북전쟁 이후 성장한 특허약 시장이었다. 당시 ‘특허약’은 여러 질환에 효과가 있다고 광고하던 상품을 가리켰지만, 실제로 특허를 받지 않은 제품도 많았다. 약사 존 펨버턴은 코카잎과 콜라열매를 넣은 와인을 팔다가 애틀랜타의 금주 조치에 맞춰 알코올을 뺀 음료를 개발했다. 1886년 완성한 시럽은 약국에서 탄산수와 섞여 판매됐다. 초기 제품에는 코카인 성분이 있었지만, 회사는 1903년 코카잎에서 그 성분을 제거하는 공정을 도입했고 방송에 따르면 1905년 무렵에는 거의 사라졌다.

펨버턴은 질환이 있을 때만 사는 약보다 누구나 가볍게 마실 수 있는 5센트짜리 음료를 구상했다. 사업 파트너 프랭크 로빈슨은 ‘코카콜라’라는 이름과 필기체 로고를 만들었다. 초기 광고에는 약효를 내세운 문구도 있었지만, 로빈슨은 점차 맛과 상쾌함을 강조했다. 특정 증상이 있는 소수보다 일상적으로 음료를 마실 다수에게 팔겠다는 방향 전환이었다.

무료 시음권과 지역 판매자의 이해관계

초기 코카콜라는 애틀랜타의 가정에 약국에서 쓸 수 있는 무료 음료권을 보내고 방문 판매원에게도 이를 나눠 주었다. 소비자는 음료를 맛볼 수 있었고, 약국은 방문객을 늘릴 수 있었다. 방송에 따르면 약국은 시럽 한 갤런을 약 1.30달러에 사서 음료 약 128잔을 잔당 5센트에 팔 수 있었다. 물과 매장 운영비를 제외하기 전 계산이지만, 판매자가 제품을 적극적으로 취급할 유인은 컸다.

1892년 설립된 코카콜라 회사는 시럽을 만들어 팔고 광고에 투자했다. 매장 이름과 코카콜라 로고를 함께 넣은 간판, 벽화, 달력과 쟁반은 판매처에도 도움이 되는 홍보물이었다. 보관과 운송이 쉬운 농축 시럽은 먼 지역의 약국으로 보낼 수 있었다. 방송에 따르면 1895년에는 당시 미국의 모든 주와 준주에서 적어도 한 곳의 판매처를 확보했다.

병입 계약이 만든 확장 시스템

1899년 아사 캔들러는 벤저민 토머스와 조지프 화이트헤드에게 미국 대부분 지역의 병입 판매권을 주었다. 계약 대가는 명목상 1달러였고, 병입업체에 파는 시럽 가격은 갤런당 1달러로 정했다. 병입업체는 코카콜라 시럽만 사용하고 병당 5센트에 판매해야 했으며, 광고 통제권은 본사에 남았다. 계약에는 종료 시점이나 시럽 가격 조정 조항이 없었다.

두 사업자는 권리를 지역별로 다시 나눠 독립 병입업체에 맡겼다. 병과 설비를 마련하고 회수·세척하는 일은 자본과 인력이 많이 들었다. 이 비용을 지역 사업자가 부담하면서 본사는 시럽 생산과 광고에 집중할 수 있었다. 방송은 10년 안에 약 400곳, 1925년에는 약 1,200곳의 병입 사업자가 생겼다고 설명한다. 고정된 시럽 가격은 훗날 본사에 부담이 됐지만, 이 계약에서 출발한 분업은 코카콜라 확장의 중심이 됐다.

확장에는 브랜드를 구별하는 장치도 필요했다. 회사는 유사한 이름을 쓰는 경쟁사를 상대로 상표권 소송을 벌였고, 병입업체들은 멀리서 보거나 손으로 만져도 알아볼 수 있는 전용 병을 개발했다. 1910년대에 등장한 굴곡진 병은 이름을 읽기 전에도 제품을 식별하게 했다.

제품의 맛을 넘어선 광고와 해외 진출

1923년 경영을 맡은 로버트 우드러프는 어느 지역에서나 같은 맛과 판매 경험을 제공하려 했다. 그는 주유소에 냉장 판매 설비를 보급하고, 품질 기준에 못 미치는 병입업체를 인수해 정비한 뒤 다시 지역 사업자에게 파는 방식도 썼다. 동시에 광고는 성분이나 효능의 설명에서 휴식, 가족, 크리스마스 같은 생활 장면으로 옮겨 갔다. 코카콜라가 산타클로스를 만든 것은 아니지만, 1931년부터 이어진 코카콜라 광고는 붉은 옷을 입은 산타의 대중적 이미지와 브랜드를 강하게 연결했다.

제2차 세계대전은 해외 확장을 앞당겼다. 코카콜라는 미군에 병당 5센트로 음료를 공급하겠다고 약속했고, 군의 이동 경로를 따라 해외 병입 시설을 설치했다. 방송이 인용한 추정에 따르면 1941년부터 1945년까지 이동식 병입 시설 64곳이 아시아·유럽·북아프리카로 보내졌으며, 병 음료 50억 개 이상이 군인에게 공급됐다. 회사는 전쟁 중의 공급이 해외 시장을 여는 시간을 크게 줄였다고 평가했다. 전후에도 현지 사업자가 병입을 맡는 구조가 이어졌다.

펩시의 도전과 뉴코크의 실패

코카콜라의 전용 병은 식별성을 높였지만 크기는 6.5온스였다. 1934년 펩시는 재활용 맥주병을 이용해 약 12온스 제품을 같은 5센트에 팔기 시작했다. 불황기 소비자에게 더 많은 양을 제시한 것이다. 이후 펩시는 텔레비전과 젊은 소비자를 겨냥한 광고에 투자했다.

1975년 시작된 ‘펩시 챌린지’는 소비자가 상표를 보지 않고 두 음료를 마신 뒤 선호하는 쪽을 고르는 광고였다. 댈러스 지역의 시도에서 출발해 각 지역 병입업체가 현지 소비자를 촬영하는 방식으로 퍼졌다. 진행자들은 블라인드 시음에서 펩시가 우세했고 이 광고가 코카콜라의 시장점유율 하락에 영향을 줬다고 설명한다. 다만 짧은 시음에서 고른 맛과 평소 구매할 브랜드는 같은 판단이 아니었다.

코카콜라는 1982년 다이어트 코크를 출시해 성과를 거뒀다. 그러나 기존 제품의 판매를 둘러싼 압박은 이어졌고, 1985년에는 원래의 콜라를 새 맛의 뉴코크로 대체했다. 회사는 대규모 시음 시험을 했지만, 새 음료가 익숙한 코카콜라를 대신할 때 소비자가 어떻게 느낄지는 충분히 파악하지 못했다. 항의가 계속되자 출시 79일 만에 기존 제품을 ‘코카콜라 클래식’으로 되돌렸다. 방송은 이후 기존 제품의 판매가 회복됐다고 설명한다.

여러 음료로 넓혔지만 남은 중심축

탄산음료 밖 시장이 커지자 코카콜라는 스포츠음료, 생수, 에너지음료 등으로 영역을 넓혔다. 파워에이드는 직접 출시했지만 스포츠음료 시장의 선두인 게토레이를 따라잡지 못했다. 2000년에는 게토레이를 보유한 퀘이커오츠 인수 발표가 이사회 승인 없이 나와 무산됐고, 이듬해 펩시가 퀘이커오츠를 인수했다. 코카콜라는 이후 몬스터의 글로벌 유통 파트너가 되고 2015년 약 20%의 지분을 매입하는 방식으로 에너지음료 시장에 참여했다.

방송이 제시한 당시 수치로는 코카콜라 회사의 연매출이 약 470억 달러인 데 비해 병입업체까지 포함한 전체 시스템의 매출은 약 1,750억 달러다. 직원 수도 본사 약 7만 명, 전체 시스템 약 70만 명으로 차이가 난다. 회사 매출의 약 69%는 탄산음료에서 나왔다. 여러 브랜드를 확보했어도 원래의 제품군과 병입·유통 구조가 여전히 사업의 중심이라는 뜻이다.

코카콜라의 역사는 음료의 제조법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시럽을 만드는 본사, 제품을 공급하는 병입업체, 판매처, 광고와 상표가 함께 규모를 만들었다. 같은 역사에는 펩시의 반격과 뉴코크의 실패, 새로운 음료 시장에 대응하는 과정도 담겨 있다.